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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수선화
어제와 같은 듯 다른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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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10. 14:31

온전한 가정에서 살아왔다는 감사함.

 

나의 엄마를 엄마라고 부를 수 있고, 나의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는 감사함.

그리고 내가 엄마와 아빠의 사랑으로 태어난 존재라는 감사함.

힘든상황 속에서도 서로의 사랑으로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은 부모님.

많이 늙으셨지만 큰 병 없이 건강한 부모님의 존재에 대한 감사함.

 

매 순간 부모님은 최선의 선택으로 나를 키워 오셨고, 살아오셨다. 최선의 선택이 항상 좋은 결과였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나는 내 선택과 내 느낌을 믿는다.

 

분명 그땐 행복했었고, 사랑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행복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 뿐이다.

사랑의 추억이 떠오를떄마다 내 발끝에 부딪힐때마다. 마음이 쓰라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삶의 중심은 나로 시작한다. 내가 행복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아둥바둥 살아가는 것뿐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떄 행복하다.

그런 내 행복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갈 것이며, 내 행복을 방해하는 사람은..

내 행복을 무너뜨리고 나의 자존감을 떨어트리는 사람에게서는 필사적으로 피하고 도망칠 것이다.

그 애도 모든 순간 내게 거짓이였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린 꺠진 그릇처럼 서로의 깨진 부분이 서로를 아프게 했던 것 같다. 너무 서로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앞으로 하게 될 다른 연애에서는 아니다 느꼈을땐, 헤어져야겠다고 고민끝에 결론을 내렸을땐, 헤어지는게 백번 천번 생각해도 맞다는 것을 알았다. 내 느낌과 나를 믿자. 내가 쎼하면 쎼한 것이다. 내가 믿고 기대해야 하는 존재는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이다.

 

 

posted by 파란수선화
2019. 7. 23. 17:28

12일 나는 PD필기 시험을 봤고, 필기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18일에 면접을 봤다. 그리고 어제 최종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18일 면접 당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봤었다.

이런저런 예상 질문에 대한 대답들을 밤새 달달 외웠는데, 정작 면접장에서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사소한 질문들을 내게 물었고, 나는 그런 사소한 나에 대한 질문과 물음에 횡설수설 했던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준비한 대답들을 어떻게든 엮어서 잘봤다. 못봤다 할 것 없이 이러저러한 면접이 끝났다.

마지막에 면접관이 내게 "좋은 결과 기대할게요", "시간이 참 빨리 가네요" 라는 말을 해 그리 나쁘지 않은 면접이었나? 싶은 마음을 갖게 됐다. 그리고 면접을 마치고 나왔을떄, 면접을 보는 사람이 굉장히 소수라는 것을 알았다.

3명의 피디를 뽑는 시험이었는데, 면접은 5명만 본다고했다. 내가 다섯명중 3명 안에는 들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자만심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 그 오만한 자만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3명을 뽑기로 되어있었는데 단 한명만 뽑았다.

그리고 그 한명이 내가 되지 못했다.

 

처음에 그 결과를 알았을떈 멍했다.. '이게 진짜일리 없어..'라는 마음으로 다시 보고 또 봤다.

그러다 화가났다. 3명 뽑는다고 했는데 왜 1명만 뽑은거지..

면접을 봤던 다른 나머지 사람들은 자격미달이었다는 건가... 억울했다.

그러다 현실을 순응하게 됐다... 눈물이 났다.. 

 

내가 전직시험에 지원한 걸 아는 유일한 동기에게 내 소식을 전했다.

원주에 오기 전엔 사실 우르르 다같이는 몰려다니며 친했지만 속깊은 이야기까진 많이 나누지 않았던 동기였다.

원주에 와서 그래도 유일한 여자 동기여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다른 사람 입을 통해 내 소식을 들으면 혹여 서운할까 미리 말을 했었고, 나의 결과를 말했다. 그랬더니 차로 10분 거리에 사는 그 동기가 우리집으로 와줬다. 녹차 프라푸치노를 들고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 그 동기가 내게 위로해준다고 말해줬던 말들이 오히려 비수로 박힌것들이 많았다.

 

그 동기의 눈에는 내가 원하는 걸 쫒아 앞으로 향하는 이런 내가 무모한 아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것 처럼 보였을까

나도 모르는 내 미래를 그 동기가 현실은 이럴꺼야 하며 단정짓는 것들이 너무 내 마음에 비수로 꽂혔다.. 

그래서 그 동기에게 '나 위로 해주러 온거 맞어?'(염장지르러 온거야?)라고 물었고, 오해를 풀려고 그 동기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둘러댔다. 하지만 나는 그 날을 계기로 아마 그 동기에게 벽을 칠 것 같다.

 

그 동기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무 달랐다.

우린 다른 환경에 살아왔고, 그 동기가 추구하는 삶과 그 동기가 생각하는 회사원. 연애관, 결혼관, 모두 달랐다.....

나는 그 동기를 한 명의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고 싶었지만 그 동기에게 나는 회사 일원 중 무모한 일을 저지르는 한 명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괜히 그 동기에게 나에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이 후회됐다. 나를 제대로 봐줄 수 없는 오히려 나에 대한 많은 것을 말하면 '앤 왜 이러지?'하며 더 공감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꺠달았다.

누군가가 누군가의 삶과 꿈을 평가하는 건 솔직히 너무 오만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 동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더 마음이 쓰라렸다.. 그냥 그 동기는 회사생활을 하는 동료로 내게 앞으로 남게 될 것 같다.

 

가끔씩 시련을 주는 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위한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도 한다.

나는 내 시련을 통해 진짜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알게됐다.

아니 이미 알고 살아왔는데, 모른척 하며 덮어왔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안락한 삶이 싫다. 사실 안락하지도 않지만,, 그냥 돈버는 기계로 살아가는 내 자신이 싫다.

나는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결과적으로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그래서 그 돈으로 부모님 빚을 갚아주고 싶다.

외삼촌이 돌아가시지 전에 부모님이 외삼촌에게 빚진 돈을 꼭 갚아드리고 싶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나로서는 그럴 여력이 전혀 없다.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내가 실천해야 한다. 가능성이 0.0001%라도 나는 해야한다.

 

PD가 되서 경력을 쌓아서 프로그램을 하나 빵 터트리고, 타사로 스카웃되어 큰돈을 손에 쥐고 싶었다. 그게 내가 노력해서 할 수 있는 로또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로또로 가는 내 꿈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다시 바닥에 왔으니 다시 또 올라가면 되겠지, 근데 서른이라는 나이가 나를 짓누른다. 아직 어리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더는 어리진 않은 나이다. 근데 또 그 서른이라는 나이도 절반보다 덜 남았다. 친구들이 차차 결혼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제자리다. 누굴 좋아하는 마음도 없고, 좋아해보려는 마음도 다 귀찮다....

 

나는 세상에서 우리 가족을 가장 사랑한다. 그 가족이 없어진 세상을 상상하는 지금도 눈에 눈물이 고인다.

너무 사랑하는데 또 가끔은 미울때도 있다. 가족을 생각하면 나만 생각하며 살아갈 수 없다.

나는 언제라도 무너질 지 모르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하지만 내게 모아둔 돈이라고는 현재 사는 월세방 보증금 5백만원과 통장에 있는 적금 2백만원. 주택청약 270만원뿐이다. 가용할 수 있는 돈은 달랑 2백만원뿐.

더이상 대출도 어렵다. 아니.. 더이상 가족을 위해 대출을 받고 싶지 않다..... 지금도 숨이 턱까지 찼다... 더는 나도 너무 벅차고 힘들다....나는 입사후 3년간 부모님의 사업을 위해 월급을 전부 드렸고, 용돈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신용대출도 5천만원 해드렸고, 그동안 내가 대학을 다니며 빚진 학자금도 이제 약 3천만원이 남아있다.

나는 입사 6년차지만 한 달 한달 살아가기 바쁘다. 돈을 모은다는 건 사치다.

 

부모님이 매달 2천만원씩 이자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드렸던 돈이 정말 필요했던 돈이지만 어쩌면 밑빠진 독에 물을 부었던걸 아닐까하는 원망도 들었다.

왜 나까지 취직하고 아무것도 해본것 없이 빚에 쫓기며 살아가게 했을까 원망했다.

하지만 나는 나와 같이 입사한 동기나 후배들의 삶을 내 삶과 비교하지만 않고 그냥 지금 다니는 회사만 다니면

돈버는 기계가 된다면 10년 정도 뒤 쯤엔 빚없이 전세로 살만한 집에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결혼은 아마 못 할 것 같다. 딱히 이 사람 아니면 죽어도 못살아 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내 처지에 결혼은 정말 사치다. 내 처지를 이해해줄 남자를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줄 남자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이다.

왜냐면 내가 남자여도 지금의 날것의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느 누구도 깊게 담아지질 않는다..

나는 내 자신도 오롯하게 담아본 적도 담을수도 없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10년 전 부모님이 처음 새 사업을 시작했을떄 외가 식구들에게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났다.

그리고 5년전 내가 취직했을떄 또 일시적으로 살아나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 그냥 어차피 무너져 내릴 모래성이었다면,,

지난 내 5년이 너무 속상하다... 원망하지 않고 가엽게 부모님을 여기려고 해도... 너무너무 가슴속에서 울분이 터진다..

처음에 내 마음은 이러지 않았다. 25살 어린 나는 입사하자 마자 신용대출 해드리고 엄마아빠에게 힘이 되어드린다는게 너무 뿌듯하고 기뻤다. 내가 해준 돈이 부모님을 살리고, 또 이 기나긴 유리밭길의 끝이라고 여겼다. 모든 것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희망 1~2년이면 다 끝날 거라는 희망. 하지만 매달 2천만원의 이자가 나가고 있고, 어마어마한 빚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떄.. 나는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임기응변을 위해 내 돈이 사용되어졌고, 나도 빚쟁이가 됐다. 나라도 편히 살게 해줄수는 없었을까. 왜.왜.왜. 나까지... 나까지.. 아니 나에게 이런 시련을 준걸까...

2009년부터 시작된 빚의 지옥은 2019년까지 계속되고 있다. 전세금이 나가면 그 해 겨울을 버티고, 세입자가 방을 빼달라고 하면 또 바들바들 떠는 시간들. 차라리 모든 부동산을 정리하려고해도 빈껍데기 매물들이라.. 전세금이나 매매값이 삐까삐가해 남는 돈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그것이 부모님의 현실이다...거기에 오빠는 부모님 사업을 돕고 있다.

오빠는 결혼을 했고 아이도 있다... 부모님의 사업이 망하면 유일하게 직장은 가진 나는 모른척 할 수 없다.

 

가끔.. 내가 신용대출 받아드렸던 돈, 5천만원과 3년간의 내 월급 1억이.. 부모님에게 헛된 희망을 줬던 것은 아닐까 싶다.

진작에 끝났어야 했는데... 진작에 매 맞고 다시 땅짚고 일어났어야 하는건데.. 계속 위태위태하게 서서 언제 넘어질지를 겸허히 기다리는 것 같다... 이 것이 내 탓일까.. 나 까짓게 뭐라고 기깟해야 월급쟁이주제에... 내 모든걸 가족에게 줬던 것이 독이 됐던 것은 아닐까... 5년전이라면 부모님이 다른 곳에 취직하거나 돈을 벌기에 좀 더 나은 나이이지 않았을까..

 

내가 가족을 원망하지 않는 방법은 빚의 늪에서 모두를 구하는 것이다.

큰 돈을 한번에 벌 수 있는 방법은 로또뿐이다.

큰 돈을 한번에 벌 수 있는 방법은 PD가 되는 것이었다. PD 가 되는 것은 내가 해야하는일이자 또 하고 싶은 일이라 너무 간절히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에게 저만치 멀어져 땅으로 떨어졌다. 괜찮을거야, 다시 글을 써보자.

극본 공모가 남았어. 극본 공모 당첨금 그걸로 또 올 겨울을 버텨보자.

독하게 마음을 또 먹어본다. 그리고 또 내가 재능은 있는 걸까 또 자신감을 잃어간다.

내 삶이 다큐고, 내 삶이 드라마다... 돈에 쫓고 쫓기는 삶

나만 생각하고 사는 삶이 사치인 삶. 일기를 마치고 나는 오늘 또 극본을 적어볼 것이다. 다시 또 일어설 것이다.

또 나는 오늘 로또를 살것이다. ... 돈 벼락을 맞았으면 좋겠다.

부모님 빚을 다 갚아드리고 싶다... 좀 더 젊으실때 인생을 즐기게 해드리고 싶다.

빚에서 구해드리고 싶은데..내가 지금 더 받을 수 있는 대출은 천 오백만원. 그것은 한달 이자도 안되는 돈이지만 내게는 무척 큰 돈이다.. 내가 해드릴수 있는건 임시방편으로 나를 곪아가며 돕는 것이다...

 

 

 

 

 

posted by 파란수선화
2019. 7. 16. 17:35

지난 12일 나는 시험을 봤다.

PD가 되는 시험. 그리고 18일날 면접이 예정되어있지만, 아직 모른다. 내가 면접을 보러갈 사람인지 아닌지

오늘 인사부에 연락해보니 채점중이라고 아무리 늦어도 내일 오전중엔 통보가 될거라고 연락을 받았다.

 

갈곳을 잃은 나는 혼란스럽다. 핸드폰 진동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컹 내려앉는다.

인사부에서 오는 문자일까봐. 가슴이 쪼여졌다가 택배 문자라는 것을 알고난 뒤에야 내 가슴은 다시 펴진다.

 

학창 시절 내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 봉착했었다.

그 시기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알바를 많이 뛰어도 장학금 받는게 더 큰 돈을 버는 것이였고, 내 미래를 위해서도 이로운 일이었다.

지금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슷한 어려움, 위기에 봉착해있다.

하지만 나는 또 무력하다. 하지만 이번엔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이 그 위기를 뚫고 나갈 힘이 되어줄 것도 같다.

그래서 글을 써보려고 한다. 세상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참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을 쓰는 건, 내가 글을 쓰는 걸 좋아해서 이기도 하고, 내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 글을 쓰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독자의 입장에서 또 읽어보고, 그렇게 유민이랑 지호가 탄생했던 것 처럼. 또 그렇게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 넣어 보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쓴 글이 그 글 속에 있는 캐릭터들이 살아서 영상으로 실존하게 된다면 그 큰 감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하는 것이 내 요즘 유일한 낙이다.

 

PD가 되고 싶다.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 그냥 직장인으로 회사의 부품으로 살아가는게 싫다.

글을 쓰고, 또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누군가의 삶의 변화시키고 싶다. 그리고 나아가 사회를 조금이라도 깨끗하고 따뜻하게 만들고 싶다. 그러면 굳이 돈을 좇지 않아도 돈이 따를 것 같다.

 

김 감독에서 김 기자 그리고 다시 또 김 PD를 꿈꾸는 오늘. 남은 내 인생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몰입하고 또 돈을 받는 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고, 기적이다.

그 기적이 내게 일어나면 좋겠다.. 정말 간절히.. 내일 오전 결과발표 전까지 나는 피가 마를 예정이다...

 

posted by 파란수선화
2019. 6. 3. 11:24

#30살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뭐든 할 수 있고, 사고 싶은 것은 뭐든 살 수 있는 나이.

 

20살때 나의 용돈은 한 달에 20만원이였다. 오늘 그런데 쇼핑으로 총 약 50만원을 썼다.

30만원정도 하는 신발을 샀고, 옷을 20만원 정도 샀다.

 

이렇게 지른 것은 드물긴한데 마음 속으로 살까 말까 했던 것들을 월요병 퇴치를 위한 마음이었을까

그냥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그 옷이 이쁘고 그 신발이 이뻤기 때문일까

나는 쇼핑을 했다. 질렀다.

 

20살의 두 달 용돈이 아주 짧은 순간에 사라졌다.

 

20살때의 나는 미국땅을 걸어 보는게 꿈이었고, 유럽여행이 꿈이었다.

 

30살의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다.

 

뭐든 사고 뭐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나를 이렇게 해주는 것은 '돈'이다.

돈에게 먹히면 안좋겠지만,

돈을 어느정도 갖고 있으면 그 돈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것들을 사줄수가 있다.

그리고 해주고 싶은 것도 해줄 수가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소소한 행복, 소소한 기쁨들은 사라져간다.

 

25살 처음 직장을 다니면서도 한달에 40만원 용돈을 받았는데

오늘 이렇게 비싼 신발을 산건 처음이다..ㄷㄷㄷ

10만원대도 비싸다고 하면서 샀는데 30만원짜리 신발이라니....

너무 이뻐서 자꾸 아른거리던 신발이니, 정말 소중히 잘 신어야겠다 헤헿>_<

 

오늘은 동기언니랑 맛난 카페에서 브런취를 먹을거다!!!!

posted by 파란수선화
2019. 3. 18. 16:30

#3. 학생은 성적, 사회인은 돈이 '권력'인가.

 

오빠에게는 고등학교 시절이 삭제됐고, 나는 중학교 시절이 삭제됐다.

오빠는 고교시절이 삭제된 채로 대학생이 됐고, 난 중학교 시절이 삭제된 채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목적지에 빨리 가는 것보다. 평범하게 그 시절에만 즐기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나는 15살에 수능을 봤지만, 다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검정고시는 보고 나서 가족들과 여행을 다녔었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가이드가 검정고시를 본 오빠와 나에게 "평범이 비범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때부터 갑자기 다시 수능을 준비해서 대학생이 되는 것이 아닌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고 싶어서 17살. 원래 내 나이에 맞춰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에 부모님은 나를 송유근?군 처럼 키우려고 하셨을 지도 모르겠지만 부모님에 나는 그냥 "교복이 입고 싶다"라는 단순한 이유로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고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나는 다시 고등학생이 됐다.

 

초등학생때도 반에서 2~3등하고, 15살에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와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합격해서 나는 내가 꽤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7살 고등학교 배치고사에서 나의 성적은 거의 바닥이었다. ㅋㅋㅋ 학교든 어디에서든 우등생으로 취급받고 선생님들의 예쁨을 받던 내가 하위권..으로 바뀌었다. 고등학교 1학년 반장선거에서 누군가 나를 반장후보로 추천해줬다. 하지만 담임은 내가 후보가 되는 것을 불허했다. 그 이유는 내가 반에서 10등에 들지 않기 떄문이다. 처음부터 반에서 10등안에 드는 사람만 반장이 될 수 있다는 기준은 어디에도 없었다. ㅎ

 

분한 마음에 공부를 어떻게 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책을 봤고 무조건 외웠다. 그러다 보니 중간시험에서는 반에서 3등을 했고 400명중 300몇등이던 내가 전교 30위권으로 진입했다. 내 성적으로 보고 나도 놀랐지만 더 놀라운 것은 선생님들의 태도였다.

나는 수업시간에 궁금한게 있으면 질문을 자주했는데 영어시간에 질문을 하자 선생님이 대답을 잘 해주셨다. 그런데 좀 쉬운 질문을 하자 나보고 성적을 물으셨고 당시 배치고사 점수를 말하자. 공부는 잘하게 생겼는데 그거 밖에 안되냐는 식으로 반애들 다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며 그 뒤로는 내 질문에 대답을 잘 해주지 않으시며, 기초를 모르면 스스로 공부하고 예습복습을 열심히 잘하라셨다... 그랬던 선생님이 내가 성적점프상도 받고, 성적우수상도 받자 태도가 싹 바뀌셨다. .. 그리고 내 말을 믿고, 신뢰하기 시작했다.

반장선거에 못 나가게 했던 담임도 내게 '줄탁동시'라는 말을 쓰며 내게 편지를 쓴 적도 있다. 내가 성적 오른게 자기의 가르침과 나의 노력이 더해졌다며.. 하...;;

 

처음엔 분하고 그 사람들이 가증스러웠지만, 바뀐 태도로 나를 대하는 그들의 모습이 달콤해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됐다. 그리고 고등학교 2,3학년은 모두 반장을 하며 고등학교를 마쳤다.

 

고등학생떄 아무리 공부 열심히 해도 1등을 해본 적은 없었다. 전교 1등을 보며 그애를 보며 따라서 공부했지만 1등은 죽어도 못했고 모의고사 성적은 내신성적보다 더 안 좋아서 분해서 울때가 있었다. 욕심과 승부욕이 꽤 많았던 나였다. 학창시절 경주마처럼 성적을 쫓던 나. 가장 큰 일탈이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노래방 갔던 일. 해 뜨기 전에 학교를 가서 밤 늦게 집에 가던 그 시절. 내가 기계부품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된 건 부모님의 한 마디 덕분이다.

공부를 해서 생각했던 것 보다 점수가 나오지 않았을 때 난 자주 혼자 울었고, 가끔은 엄마아빠한테 나의 감정을 폭발한 적이 있었다. "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나봐. 머리가 나쁜가봐" 그때 아부지랑 어무이가 내게 "엄마아빠는 똑똑한 딸보다. 착하고 건강한 딸이 더 좋아"

"최고가 되기 보다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괜찮아"라고 하시면 날 꼭 안아주셨다. 그때의 그 따뜻함이 지금까지도 내게 남아있다.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내게 성적으로 닥달했던 적도 없다. 진심으로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랬던 것 같다. 욕심쟁이였던 건 나였다. 착하고 건강하게 잘 자랐을까? 아직도 나는 욕심쟁이같다. ㅎㅎ

 

우린 어린시절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왜 공부를 해야하냐고 물으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면 왜 좋은 대학에 가야 하냐 라고 하면 좋은 곳에 취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왜 좋은 곳에 취직해야 하냐라고 하면 그래야 행복한거고 성공한 거라고.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여기서 좋은 곳은 쉽고 돈 버는 화이트 칼라 일을 하는 곳 같다. 하지만 그곳에 가야만 행복해 진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 나는 남들이 봤을때 '좋은 곳'에 취직했다.

일하는 것보다 많은 돈은 벌고 있다. 신입사원때는 일 한거라고는 없고 그냥 선배들 눈치만 보면서 회사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많은 월급이 나와서 '이 돈이 내게 적당한 돈일까?' 라는 죄책감이 들기도했다. 그 좋은 곳에 취직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행복한 것은 아니다. 단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을 뿐. 하지만 또...그 경제력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줄 수 있고,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인데... 좋은 곳에 취직은 했기에 그게 가능한 것일까.... ㅠㅠ 그래.. 어느정도는 그럴수도 있겠다.

 하지만! 꼭 좋은 곳에 취직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내가 혹시 이번생에.. 결혼을 한다면ㅋㅋ

내 자식이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고 그애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랐으면 좋겠다.

 

#똑똑한 아들, 딸보다 착하고 건강한 아들, 딸이 되자.

#물론 ... 똑똑하고 착하고 건강하면 더 좋다 ! ㅎㅎㅎㅎ 

 

 

 

posted by 파란수선화
2019. 3. 18. 15:46

#2. 둘째라서 서럽다? 다행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장손, 장녀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던 것 같다. 뭐 아닌 가정도 있겠지만

첫 아이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둘째랑 비교도 안되는 것 같다. 어떤 일이든 '처음'이라는 것이 주는 그 특별한이 다 있는데, 내 첫 자식은 어떻겠는가? 열 손가락 물어 안 아픈 손가락없다지만 그래도 말이다. 장손과 장녀에게 편애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고, 당연할 수도 있을것 같다.

 하지만 나는 둘째로 자란 아버지와 막내로 자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오빠와 내가 커갈때는 굉장히 평등하게 자랐다. 오빠가 첫 째라서 오빠라서 친척들이 오빠에게 돈을 더 줘도 부모님이 똑같이 항상 나눠서 다시 주시곤 했다. 오빠는 억울했을 법도 하다. 대신 나는 오빠가 군대 갔을떄 친척들한테 용돈을 받으면 오빠 몫도 챙겨준다고 약속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순수했다.

 

오빠가 아팠을때, 큰 병원에 못 갔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많이 바빴다.

그래서 동네 의원을 갔기 때문에 단순한 맹장을 키웠다. 그래서 오빠는 많이 아팠고, 오빠의 인생의 큰 변곡점이 됐다. 그 떄문에 부모님은 오빠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그 일을 겪은 뒤로는 오빠와 내가 조금만 아파도 무조건 큰 병원을 데리고 가셨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긴 일이 있었다. 내가 배가 아팠던 날이다. 그래서 맞벌이 중이시던 부모님이 오빠보고 나를 큰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해서 둘이 병원에 왔다. 이것저것 검사를 받고 의사를 기다릴 때즘 아빠가 오셨다. 그리고 얼마나 급히 오셨는지 허겁지겁 달려온 아빠는 의사에게 어디가 아픈거냐 뭐가 문제인거냐 물었고, 의사는 아빠에게 그리고 나에게 "ㄸ이 가득찼다"라고 대답해줬다. 어찌나 민망하던지.....ㅋㅋㅋㅋ.....

 

나는 둘째라서 서러운 것 보다 다행인 게 더 많았던거 같다. 그래서 부모님께도 오빠에게도 너무 감사하다. 다음 생에도 부모님의 딸로 태어나고 싶다.

그리고 오빠의 여동생이 아닌 누나로 태어나서 더 잘해주고 싶다.

 

#다음생에도 아빠엄마 딸이 될게

#오빠 다음생엔 내가 누나해도 되겠니??? ^_^

 

 

 

posted by 파란수선화
2019. 3. 18. 15:21

#1. 나의 사춘기

 

의무감에 일기를 쓰던 초등학생 시절을 지나 열다섯 열 여섯 사춘기 시절부터는 스스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사춘기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기 보다는 '죽음'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에 하루 하루를 남기고 싶어져서 였을까..? 매일매일은 아니지만 그날 그날의 내 마음을 내 느낌을 그날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싶어졌다.  

 

위로 있는 오빠가 단순한 맹장이었는데 동네 의원에서는 진통제만 놔주다가 결국 복막염까지 갔다. 그래서 오빠는 중고교 시절을 병원에서 보냈고, 초등학교 6학년 부터 학교를 마치면 오빠 병원으로 가서 오빠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병실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 오빠와 나. 우리 오빠는 정말 착하고, 똑똑한 오빠였다. 다정다감하고 정말 순한 사람. 그런데 아무리 그런 사람도 어떤 환경 속에서 지내느냐에 따라 성향이 바뀌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통통 부어오른 오빠의 팔에 간호사들이 주사를 놓을때 한번에 된적이 거의 없었다. 혈관이 잘 보이지 않던 오빠의 팔에 여러번 주사바늘이 꼽힐 때마다 오빠는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오빠는 얼마나 억울할까? 보통 맹장이면 3일? 4일이면 수술하고 퇴원까지 하는데 오빠는 13시간이 넘게 수술을 했고, 인공장기를 달아야 한다 하면서 병원사람들은 우리에게 겁을 주기도 했다.

당시 우리의 기도는 우리 오빠가 살기만을 바랬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받아들여준 신은 오빠를 살려줬다. 하지만 오빠는 중요한 시간들을 잃어버렸다.

 

책상에 머리 박고 전교 1등처럼 공부 해도 반에서 겨우 3등안에 들던 나와 달리 오빠는 항상 1등이었다. 반에서는 당연히 1등이고 전교에서도 순위권안에 드는 똑똑한 오빠였다. 그래서 나는 살짝 뭐든 덜 열심히 해도 오빠의 뒤에 가려져 편하고 즐겁게 생활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도 괜찮았다. 든든한 나무 같던 우리 오빠. 오빠가 병원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공부를 하려고 했을때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마나 억울했을까.

 

병원에서 처음 나는 빈혈을 경험했다. 오빠 병간호를 할때는 유일하게 만화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시던 부모님 밑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꽤 엄격하게 자라왔는데 유일하게 '일탈'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오빠 병간호 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당시 철없던 나는 오빠 병간호 가서 보내는 시간이 즐거울 때도 있었다. 오빠가 빌려오라는 책을 적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적고 오빠 병실로 와서 우리는 독서 삼매경에 빠졌더랬다. 오빠가 금식인 날은 혼자 병원밖을 나가서 김밥을 사먹곤 했는데 책을 읽다보면 그 시간도 귀찮았다.

 

처음에는 둘다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만화책은 너무 금방 읽어버린다는 점을 알게 되고 그 후로는 나는 인터넷 로맨스 소설책을 빌려보고 오빠는 판타지 소설을 읽어보게됐다. 책을 읽고 또 책을 읽으며 밥을 거르고 화장실을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티비가 고장났을때 나오는 화면처럼 찌지직 거리면서 어리저웠다. 그래서 병원 복도에 잠시 주저 않았다가 화장실에 갔는데 그때는 아예 시야가 검은색으로 변했고, 나는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는지 사람들이 화장실에 들어오는 소리에 조용히 혼자 일어나서 오빠 병실에 가서 또 책을 읽었다.

 

아, 나의 사춘기 시절의 중요 관심사가 죽음이었던 것은 병원에서의 생활이 큰 것 같다. 병실의 사람들은 바뀌었다. 맹장 수슬을 하고 3~4일있다가 퇴원하는 사람. 상태가 안좋아져서 중환자실로 가는 사람 그리고 아예 영영 돌아오지 않던 사람. 나는 죽는다는 것이 참 무서웠다. 영엉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니까. 종교를 가진다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게되어 선하게 살던 사람들은 천국으로 가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지옥에 가겠지. 하지만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는 있을까? 내 기억들을 다 잊어버리진 않을까?

 

사후 세계가 있다는 것은 죽어야만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을 어느 누가 확실히 있다 없다 100% 확신하며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이 태어나서 단순히 흙으로만 돌아간다면 너무 허무하니까...

종교에 대한 믿음이 적은 나 조차도 사후세계가 있길 바랄 뿐이다.

 

나는 열다섯 열여섯 때 엄마아빠 방문앞에서 자곤 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날때마다 눈물이 났다. 내가 죽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도 하루 앞으로 다가왔구나.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을 어떻게 나는 견뎌낼 수 있을까. 하며 말이다.

꽤 오래 그런 시간을 보냈고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공부에 치여서 그걸 잠시 잊고 살다가 대학생이 되고 또 직장인이 된 것 같다. 

 

#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항상 느끼고 산다는 것을 사람을 덜 나태하게 하는 것 같다.

#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고 또 나도 죽는다.

 

posted by 파란수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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